전영근 - 사물로 이루어진 삶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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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근 - 사물로 이루어진 삶의 풍경
  • 박영택·경기대 교수/미술 평론가
  • 승인 2020.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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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택의 그림이야기]

전영근은 사물을 그린다. 사물은 인간의 신체와 연동되어 있는 존재들로서 저마다 다른 물성과 표정을 거느리고 있다. 작가가 그리고 있는 사물은 작업실 공간에 이미 있는 것들이고 일상에서 쓰던 것들이다. 물론 상상에 의해 그려진 것도 더러 있지만 매우 드물다. 대부분은 작업실 실내 풍경이자 그곳에 놓인 평범한 일상의 물건들이다. 책과 병, 안경, 주전자. 야구공, 망치, 커피그라인더. 의자, 화분, 항아리와 푹신한 소파 등을 작가는 반복해서 그린다. 일상이 반복되듯 사물들 역시 지속적으로 조금씩 다른 배열과 접속, 크기를 통해 출현한다. 그것은 마치 모란디의 정물화와 같은 유사한 구성을 연상시키거나 팝아트의 동일한 소재의 반복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같은 이미지를 반복하기 시작한 것은 반복이 같은 이미지를 변화시키는 방식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앤디 워홀의 말이다. 이는 반복을 통해 차이를 생성한다는 이른바 ‘반복 가능성’ 개념이다. 워홀의 경우는 반복을 통해 현실을 사라지게 하고 그 자리에 반복되는 복제 이미지들만 안겨주었다.

전영근의 그림 또한 동일한 소재들이 반복되면서 차이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표면에는 단순한 복제나 재현이 아닌 지속되는 순환과 반복되는 출현이라는 묘한 심리와 정신적 상황이 어른거린다. 그것은 일상과 사물을 보는 내밀하고 정서적인 결과 결부되어 있는 편이다. 대상을 탈상징화 하거나 감정을 방어하려는 팝아트의 전략과 달리 이 그림은 사뭇 정서적이다. 사물들은 인간적인 표정과 마음을 표면으로 밀어내면서 질주하듯 다가온다. 속도감을 안기는 붓질과 단호한 마감, 선명한 형태감이 그만큼 사물의 초상을, 그 고유한 물질의 본성과 도구의 솔직한 기능성을 맑고 투명하게 보여준다.    

▲ 전영근, 책상, 캔버스에 유채, 2020
▲ 전영근, 책상, 캔버스에 유채, 2020

작가는 작업실에 놓인 지극히 소소하고 소박한 사물을 화면 안으로 호명한다. 그 선택으로 인해 등장한 것들이 익숙한 정물의 소재와 다르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그 대상들이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전영근 특유의 도상화와 색채, 질감, 붓질의 운용 등이 찰진 표면과 편하고 부드러우며 유머 감각이 베인 회화적 맛을 안긴다. 그것은 마치 필립 거스통의 회화에서 만나는 감각과 유사하다. 우리 삶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점이나 어린아이와 같기도 하고 익살스러운 만화와도 같은 맛들이 깊게 배어있다. 손쉽게 그려나간 듯한 민첩함과 경쾌한 맛이 있고 무엇보다도 거침없이 밀고 나가는 한 획의 붓질, 자신의 그림 그리는 과정의 그 궤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점이 인상적이다. 두툼한 질감을 촉지적으로 형성하며 붙어있는 물감의 층으로만 이루어진 동시에 그 붓질, 물감이 구체적이고 인지 가능한 형태를 편하게 안겨주는 그림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붓질이다.

구체적인 형상을 그리고 있지만, 표면은 선명하고 규칙적인 붓질로 구성되어서 추상적인 붓질과 구체적인 형상이 다소 모순되게 얽혀있다. 붓질만이 드러나는 그림이란 다분히 모더니즘적 발상이다. 회화의 존재론적 조건으로 그림을 환원시켜 납작한 평면성의 피부와 그림을 이루는 구성인 물감, 붓질로 귀결되어버린 모더니즘 회화에서 붓질은 그것이 실재가 아니라 그려진 그림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림이 그려지는 상황(시간과 행위)을 고스란히 방증하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 전영근, 커피그라인더, 캔버스에 유채, 2020
▲ 전영근, 커피그라인더, 캔버스에 유채, 2020

전영근의 회화에서 두툼한 살을 탑재한 채 신속하게 직진하는 듯한 가로선의 붓질은 대상을 형상화하는 동시에 그 대상에 대한 작가의 인식, 감정적인 부분을 촉각적으로, 매우 구체적인 표정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듯 보인다. 수평의 가로선과 함께 바닥의 세로선(마루바닥을 묘사하는 직선)은 화면 구성의 긴장감을 고려한 배려로 읽힌다. 동시에 이 붓질은 자신만의 표식으로, 자기 회화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담보해주는 흔적으로 응고되어 있다. 전영근만의 붓질과 물감의 운용을 통해 고유의 스타일을 만들고자 한다는 얘기다. 어쩌면 이 스타일 속에 개별 사물들이 수렴되어 동일한 붓질, 색채 안에서 배열을 달리하는 형국이 그의 그림을 이루고 있어 보인다.

한편 작가는 대부분 위에서 내려다본 시선을 유지한 채 대상을 적조하게 응시한다. 또는 단독으로 화면의 중심부를 가득 채우거나 직립하듯 서 있다. 그 사물의 존재감 자체가 전면적으로 밀고 들어온다. 우리는 익숙하지만 낯설게 다가오는 이 사물의 형태와 색채를 다시 보고 그 존재의 색다른 면을 발견한다. 좋은 그림은 익숙함을 낯설게 하고 무심하게 응시하는 시선을 거두고 주의 깊게 보게 한다. 진부하고 상투적인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어떻게 새롭게 환생하면서 나와 대등한 존재로 자리하고 있는지도 깨닫게 해준다. 나를 중심으로만 보던 세계관이 슬쩍 무너진 자리에 사물들의 고유성과 사물과 사물 간의 관계를 주목하게 한다.


박영택·경기대 교수/미술 평론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뉴욕 퀸스미술관에서 큐레이터 연수를 마쳤다. 금호미술관 큐레이터를 거쳐 1999년부터 현재까지 경기대학교 서양화·미술경영학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전시분석, 미술비평, 큐레이터십, 이미지 읽기, 현대미술의 이해 등을 강의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식민지시대 사회주의미술관의 비판적 고찰」 「한국 현대동양화에서의 그림과 문자의 관계」 등이,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테마로 보는 한국 현대 미술』을 비롯해 다수가 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 서울시립미술관 운영위원, 한국미술품감정연구원 이사, 정부미술품 운영위원, 아트페어 평가위원, 2020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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