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물론’으로서의 객체지향 존재론, 그 가능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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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물론’으로서의 객체지향 존재론, 그 가능성은?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04.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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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기]

■ 깊이 읽기_ 『비유물론: 객체와 사회 이론』 (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03)
 

사회적 세계에는 어떤 객체들이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책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라는 기업을 ‘사회적 객체’의 본보기로 삼고서 “복잡한 사회적 객체들을 분석하기 위한 새로운 철학적 방법,” 즉 ‘비유물론’의 객체지향 사회 이론을 소개한다. 객체에 대한 관심은 유물론의 한 형태에 해당한다고 흔히 가정되지만, 사변적 실재론 철학자 하먼은 이 견해를 거부하면서 대신 독창적이고 독특한 ‘비유물론’ 접근법을 전개한다. 다시 말해 저자는 끊임없는 변화와 전일론적 네트워크, 수행적 정체성, 인간 실천에 의한 사물의 구성에 관한 현행 사회 이론들을 반박하면서 사변적 실재론의 한 갈래라 할 수 있는 자신의 객체지향 존재론(OOO: Object Oriented Ontology)에 입각하여 사회생활 속 객체의 본성과 지위를 규명하고자 한다.

비유물론: 환원에 반대한다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 이론의 근간을 이루는 철학적 제1원리는 ‘객체의 환원 불가능성’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자연적 객체든 사회적 객체든 간에, 다양한 규모의 개별적 존재자 또는 ‘실재적 조립체’로서 객체의 본질은 ‘물러서 있음’에 있고, 따라서 모든 객체는 ‘환원 불가능하게’ 자율적인 실재성을 갖추고 있다. 다시 말해서, 객체는 “행위를 실행하기에 존재하기보다는 오히려 존재하기에 행위를 실행한다.”

그러나 하먼에 따르면 지금까지 구상된 객체에 관한 철학은 어떤 객체를 그 구성요소들로 환원하거나(아래로 환원하기), 그 관계들이나 행위들로 환원하거나(위로 환원하기), 아니면 이 두 전략을 결합하여 양방향으로 환원함(이중 환원하기)을 했다. 그리하여 객체를 객체에 관한 인간의 지식으로 대체하면서 객체 자체의 ‘무엇임’ 또는 객체성을 도외시했다. 하먼이 보기에는 지금까지 철학사에 제출된 모든 종류의 유물론도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하먼은 이들 ‘환원하기’ 전략은 객체를 인간과 연결함으로써 객체의 실재성과 자율성을 부정하게 된다고 비판한다.

▲ 그레이엄 하먼과 『비유물론』
▲ 그레이엄 하먼과 『비유물론』

코로나19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유물론이 답하는 방식

예컨대 코로나19 바이러스란 무엇인지 묻는다면, 흔히 두 가지 답변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하먼의 설명이다.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아래로 환원하기) 말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무엇을 행하는지(위로 환원하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답변은 코로나19의 의미를 충분히 알려주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코로나19의 모든 특성을 알 수 있더라도, 그 특성들을 전부 나열함으로써 실제 바이러스가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객체를 그것의 “물리적 구성요소들로 아래로 환원”하는 대표적인 전략이 고전 유물론 또는 과학적 유물론이고, 객체를 그것의 “사회·정치적 효과들로 위로 환원”하는 대표적인 전략이 사회구성주의적 포스트모던 유물론이다. 이렇게 해서 하먼은 객체의 실재성, 즉 ‘환원 불가능성’을 긍정하는 자신의 객체지향 방법론을 ‘비유물론’으로 지칭하면서 “변화는 간헐적이고 안정성이 표준이다. 실체/명사가 행위/동사에 우선한다”와 같은 비유물론의 몇 가지 공리를 이 책에서 제시한다.

인류세, 예술, 건축과 객체지향 존재론

단적으로 표현하면, 비유물론은 “모든 규모에서 존재하는 존재자들을 어떤 근본적인 구성적 층위로 용해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그 결과, 원생동물이든, 반려견이든, 피자헛 매장이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든, 행성 지구든 간에 모든 객체는 자율적인 실재성을 갖추고서 세계를 구성하고, 각각의 객체는 다른 객체들의 실재적 조립체라는 세계상이 부각된다. 그리하여 실재적인 객체로서의 지구는 자율적인 역능을 갖추고 있기에 인간의 생존에 무관하게 주변 환경에 따라 돌연히 변화할 수 있다는 탈인간중심주의적 자각이 기후변화로 특징지어지는 인류세 시대에 객체지향 존재론 접근법이 갖는 의의이다.

한편으로, 예술 작품과 건축 작품에도 역시 그 물리적 구성요소들로 아래로 환원하거나 그 사회·정치적 효과들로 위로 환원한다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함이 확실하다. 이런 점에서 양방향으로의 환원에 저항하는 미학을 제일 철학으로 삼는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이 철학보다 오히려 예술과 건축 분야에서 더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현 상황은 주목할 만하다.

객체지향 사회 이론: 사회적 객체의 존재론적 전기

비유물론의 객체지향 사회 이론에 따르면, 인간들을 일부 구성요소로 삼는 실재적 조립체로서 사회적 객체는 불가피하게도 탄생, 공생, 성숙, 퇴락, 그리고 죽음이라는 독자적인 생명 주기가 있다. 인간중심적인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사회적 객체, 예를 들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인류에 미친 영향과 그로 인한 사건들이 중요하겠지만, 객체지향 사회 이론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자체의 존재 또는 본질의 형성과 변화에 주목한다. 이런 의미에서 객체지향 사회 이론은 사회적 객체의 역사를 다루기보다는 사회적 객체의 존재론 또는 존재론적 전기를 다루게 된다.

그러므로 객체지향 사회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사회적 객체의 존재 또는 본질 형성과 관련된 메커니즘인데, 이와 관련하여 하먼은 린 마굴리스의 연속 세포 내 공생 모형을 사회적 맥락에 이식함으로써 구상한 독자적인 ‘공생’ 개념을 제시한다. 연속 세포 내 공생설(Serial Endosymbiosis Theory, SET)은 진핵세포 내부의 소기관이 나중에 통합 세포의 부속 성분이 되기 전에 한때 독립적인 생명체였다고 본다. 하먼의 공생 개념은, 어떤 사회적 객체가 무언가 다른 객체들(사람이나 장소, 사물)과 유대를 이룸으로써 자신의 생이 전환되는 계기를 형성할 때의 관계를 가리킨다. 그런 공생이 강한 유대로 굳어질 때 사회적 객체는 성숙의 단계에 이르게 되고, 그 후에는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기에 퇴락을 거쳐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탄생, 성숙, 퇴락, 죽음

이 책에서 하먼은 라이프니츠가 개별 객체로 인정하지 않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역사를 비유물론적 접근법을 사용하여 분석함으로써 개별 객체로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존재론적 일대기를 재구성한다. 여기서 하먼은 여섯 가지의 공생을 특정하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맺은 각각의 유대 관계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특질을 비가역적으로 형성하는 전환적 계기가 되는 사유를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그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공생 국면을 그 기업의 탄생, 성숙, 퇴락, 죽음으로 구분한다. 끝으로 하먼은 사회 이론에서 “객체지향 존재론 방법의 15가지 잠정적인 규칙”을 사회적 객체를 분석하기 위한 지침으로 제시한다.

또한, 하먼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사회적 객체의 본보기로 사용함으로써, 이 책의 독자는 필경 향신료 무역의 독점권을 확보하고자 한 그 기업의 역사에 내재하는 폭력과 착취의 이력을 통해서 동인도 지역에서 전개된 제국주의적 서구 자본주의의 실상을 엿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이 책은 사회적 객체로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존재론에 관한 철학서이면서, 동인도 향신료 독점기업으로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역사서로도 읽힌다.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첫 번째 부분은 『비유물론』의 지은이 서문으로, 여기서 하먼은 “객체지향 존재론 방법의 15가지 잠정적인 규칙”을 철학적으로 새롭게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 객체지향 존재론은 “아직 역사가 짧은 철학이기에 다양한 전선을 따라 발달할 여지가 여전히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부분은 『비유물론』의 영어판 텍스트로 비유물론을 논의하는 1부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분석하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 5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1부 「비유물론」에서 하먼은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과 ‘새로운 유물론’을 배경으로 삼고서 자신의 객체지향 존재론을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과 새로운 유물론의 경쟁 이론으로 특징지우면서 그 변별점을 소개한다. 그리고 하먼은 자신의 객체지향 사회 이론을 비유물론으로 지칭하면서 그것을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과 새로운 유물론의 환원하기 전략을 극복하는 사회적 객체의 분석 틀로서 제안하고 그 공리들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예를 들면, 실체/명사가 행위/동사에 우선하고, 사물의 무엇임이 사물의 행위보다 더 흥미로운 것으로 판명된다.

한편, 8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2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는 공생과 유대 개념에 기반을 두고서 사회적 객체로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이력을 꼼꼼히 분석한 후에 비유물론의 객체지향 사회 이론이라는 접근법의 15가지 잠정적인 규칙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사회적 객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열쇠는 그것의 공생들을 찾아내는 것이고, 객체의 퇴락은 그 공생들의 정형화에서 비롯되며, 객체의 죽음은 그것이 맺은 유대가 지나치게 강한 데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부분은 『비유물론』의 본문에 붙인 2편의 논문으로 이루어진 부록이다. 「전기적 의미에서의 퇴락: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서 거리두기」라는 제목의 첫 번째 논문에서 하먼은 『비유물론』에 대한 라투르의 비판에 대응하여 “공생과 퇴락의 일차적 의미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전기적”이라고 주장한다.

「망각의 차가움: 철학, 고고학, 그리고 역사에서의 존재론」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는 하먼은 매클루언의 매체 개념을 차용하여 존재론과 고고학은 역사와 달리 구조와 패턴의 ‘차가움’을 추구하기에 『비유물론』에서 전개된 설명은 고고학적이라는 흥미로운 논변을 전개하고, 어쩌면 『비유물론』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고고학으로 일컬을 수 있다고 응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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